임요환과 홍진호. 대한민국 e스포츠계를 이끌어온 이 두 사람의 만남에는 '임진록'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그만큼 이들의 만남은 언제 어디서나 팬들의 기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야말로 세기의 라이벌이지만 경기장 바깥에서의 그들은 허물없이 친근한 형과 동생이다.
◆티격태격, 라이벌은 라이벌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한 것은 임요환이었다. 약속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 나타난 임요환은 홍진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대뜸 휴대전화부터 꺼내들었다. "어디야?" 누군지 밝히지도 않고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지만 건너편의 홍진호도 익숙한 듯 짧게 위치를 설명한다. 통화를 끝내고 먼저 음료를 주문하며 여유있게 기다리던 임요환은 잠시 후 홍진호가 도착하자 다짜고짜 손을 내민다. "7분 지각했다. 벌금 7만원!" 홍진호는 가벼운 코웃음으로 답했다.
언제나 티격태격이다. 경기장에서 뿐 아니라 사석에서 만날 때도 사소한 말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둘이 같은 음료를 주문해놓고 "따라하지 말라"는 둥 서로를 견제한다. 첫 인상을 물어도 서로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임요환은 2000년 쉐르파배 대회에서 만난 홍진호의 첫 인상을 '좀 놀던 청소년'으로 규정했다. 그러자 이에 발끈한 홍진호는 "요환이 형은 그 때 16강에서 탈락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대꾸했다.
◆내가 우승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수많은 '임진록' 매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코카콜라배 스타리그 결승전을 꼽았다. 홍진호는 자신이 패배했던 4경기 '라그나로크'에서의 일전을, 임요환은 3경기 '네오 레가시 오브 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단다.
"제가 정말 준비를 많이 했던 경기거든요. 그 때 저랑 연습게임을 해줬던 MBC게임 김동준 해설이 확실히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격려를 해 줬을 정도였어요. 자신감 있게 경기에 들어갔는데, 순간의 판단 미스로 공격 타이밍을 놓친 것이 실수였죠. 그 경기 이겼으면 내가 우승인데!" 홍진호가 아쉬움을 금치 못하자 임요환이 반격했다. "나도 3경기에서 터렛 한 칸 내려서 지었으면 이길 수 있었어!"
◆벙커링, 그 뼈아픈 추억
2004년 에버 스타리그 4강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홍진호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말도 마세요. 그 경기 덕분에 제 인생에서 1년이 사라졌어요." 이번에는 임요환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한다. 미안하긴 미안했던게다. 새삼스레 2년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홍진호에게 임요환이 멋적게 한 마디 한다. "나도 3경기에서는 반신반의 하면서 시도했어. 반쯤은 막히겠거니 했지." 그러나 그 한 마디가 역효과를 불렀다. "일꾼 다 끌고 왔으면서 뭐가 반신반의야!" 이후로도 홍진호는 한참동안 살풀이(?)를 했다.
◆요즘 신예들, 그리고 지금의 e스포츠
"딱 게임하기 좋은 나이죠.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게임 아니면 재미있는 것도 없을 때고요" 최근 신예 선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이유를 두 올드 게이머는 그렇게 분석했다. "스물 둘에서 셋 정도? 그 정도까지가 최적의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나이인 것 같아요. 그 나이가 지나면 세상에 게임 외에 다른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할까요."
그들은 요즘들어 자주 지적되는 '재미없는 게임'에 대해서는 최적화 빌드가 가져오는 맹점이라고 말한다. "이걸 하면 좋은게 뻔한데 일부러 모험을 하는 선수는 없죠. 그렇게 되면 너도나도 같은 빌드를 사용하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승률이 높아지지만 그만큼 재미는 떨어지는거죠."
임요환은 최근의 e스포츠를 '정체기'라고 표현하며 여러가지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지금 전략이 돌고 도는 이유는 게이머들이 현재 쓰고 있는 전략보다 더 나은 전략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게이머들이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랜덤 플레이어들이 나오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맵을 랜덤으로 선택해 경기하는 것도 새로운 재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게이머의 기본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서라면 선수에게 맵을 일체 공개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게임을 치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수들로서는 힘든 일이지만 매 시즌마다 리그 맵이 전부 바뀌는 것도 좋습니다.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e스포츠는 발전할 수 없으니까요."
◆10년 후의 '임진록'
10년 후를 떠올리는 것은 아직 20대인 그들에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나보다. "그냥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지 않을까요. 게임계에서는 말년 감독쯤?" 어쨌든 게임과는 떨어질 수 없을 것 같다는 임요환의 말이다. 홍진호는 아직 생각이 없는지 결혼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게임계에 남아있다면 코치나 감독을 해 보고 싶어요. 그렇게 되면 아마 요환이 형이랑 다시 붙게 될 수도 있겠죠. 그게 아니라면 여행을 좋아하니까 그 나이쯤 되면 어딘가 떠나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진지하게, 편안하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인터뷰를 진행하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노장의 관록이 묻어나왔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인 그들이야말로 '라이벌 이상의 라이벌'이 아닐까.